아버지가 4월 23일 돌아가셨다. 엄마가 4년 전 돌아가셨으니 이제 남은 유족은 우리 딸 셋과 그 가족이다.
직계가족 3인은 일단 디폴트로 상속을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5억 원을 공제하고 상속세를 계산한다고 해서, 우리는 대충 10억 정도의 자산을 상속받는 것으로 계산하면 됐다. 여기에는 땅과 집, 현금성 자산이 있었다.
집은 약 6억 내외로 시세가 형성되어 있었다. 땅은 약 1억 정도였다. 땅은 맹지였는데, 매입하던 20년전 약 1억 원에 샀는데 맹지가 되는 바람에 팔리지가 않는 상태가 돼서 결국 1억 정도로 대충 계산했다. 현금성 자산은 아빠가 가지고 계셨던 은행예금을 중심으로 약 3억 정도가 있었다. 기타 등등, 결국 10억에 해당하는 자산에 약 30-40% 의 상속세가 매겨진다면 약 3억 정도의 상속세를 내야 했다. 일단 아빠의 현금으로 대충 상속세를 낼 수 있는 계산은 되었다.
이건 대충의 계산이었다. 상속세는 사망후 6개월 시점에 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보통 현금성 자산이 없는 경우 상속 부동산을 빠르게 현금화해야 한다. 그래서 급매로 부동산에 집이 나오기도 하는데, 우리는 아빠의 예금 덕에 그리 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수십 년간 친정으로 알고 명절이나 휴일에 왔던 부모님의 집. 이 집을 급매로 내놓는 것은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우리 딸 셋 다 주택 보유자라서 2 주택 이상인 경우에 해당하는 양도세를 너무 많이 내야 하다 보니 웬만하면 6개월 내에 처분하자는 결론이 나긴 했다.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유품 정리를 할 수 있으며, 아빠 엄마와의 추억을 기릴 수 있는 6개월의 이별 준비 시간이 또 시작된 것이다. 작년 여름 2023년 6월 29일, 동네 내과 의사가 아빠의 혈액수치가 이상하다고 검사와 약물을 처방해 주었다. 그 이후로 아빠는 긴 투병 시간을 시작했다. 그리 긴 것도 아니었나? 아빠는 1년도 안 되어 엄마 곁으로 가셨다. 그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우리 불쌍한 딸 셋은 아빠마저 잃고 싶지 않다며 고군분투했다. 부정했고, 허용된 신약을 기꺼이 처방받게 했고, 식단관리도 했고, 신약 임상도 찾아 모색했다. 하지만 아빠는 쇠약해졌다. 멍해져 가던 아빠의 모습... 그러나 아빠는 암성 통증에 시달리지는 않으셨고, 그냥 쇠약해져서 돌아가셨다. 우리 딸 셋은 보초병 서듯이 구글 달력에 담당을 정해서 아빠를 보살폈다. 때로는 안타깝고, 때로는 지루하며, 희망과 실망, 그리고 입 밖으로는 내놓을 수 없는 예견된 이별에 대한 두려움, 직면하고 싶지 않은 가까운 미래... 이런 복잡한 감정들로 뇌의 50% 이상이 점령된 상태로 이 기간을 보냈다. 나는 그나마 주중에 직장생활을 하는 시간 동안은 까맣게 잊었다. 회의를 하고, 회사 일에 고민했다. 그러다가도 카톡 단톡방에 동생들이 올리는 아빠 소식, 주말 담당일 때 내가 올리는 아빠 소식으로 우리 딸 셋은 희망에 차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울고 웃고 그랬다. 그 10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직장동료를 비롯해서 무려 3명 이상이나 아버지를 잃었다. 그들이 장례식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하면 그들은 잠시간의 아버지 장례식 후속 경험을 나누고,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가 당연히 회복해 왔다고 생각하고 정신없이 업무를 진행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업무에 복귀했다. 나는 월요일 저녁 헬스장에서 pt를 받는다. 그 다음 날 오후, 아빠가 돌아가셨다. 삼일장을 치르고, 아빠를 엄마와 함께 예쁜 소나무 밑에 묻어드렸다. 발인한 그날은 목요일. 그리고 집에 돌아왔다. 그다음 날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은 pt 예약이 있는 날이다. 나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나는 그냥 갔다. 그리고 pt를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 몸이 힘든 것은 마음이 힘든 것에 비해 마음이 편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몸을 힘들게 하고 싶었나 보다. 3일장을 하는 동안은 모든 것을 잊고 아빠를 그리워하고 슬퍼할 수 있는 허용된 시간이었다. 마음이 아파도 되는 시간. 그러나 3일장이 끝났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몸의 고통으로 옮기고 싶었나 보다. 나는 열심히 PT를 받았지만, 힘이 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PT 트레이너가 물었다. 주말에 뭐 하세요? 아.. 네 이제는 간병하러 가지 않아요. 아빠가 돌아가셨거든요. 어제 발인하고 온 거예요. 트레이너가 당황했다. 나는 그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해하는 것을 보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말했다. 마음을 힐링하러 온 거예요. 운동으로... 트레이너가 나를 위로해 줄 시간은 거의 없다. 그다음 트레이닝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안심하는 듯했고, 간단한 위로와 함께 힘을 내라는 말을 해줬다. 그걸로 충분하다. 어차피 위로는 위로일 뿐이다. 그런데, 월요일과 금요일, pt 를 받는 두 날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똑같았다. 하지만 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아빠라는 사람이 없어졌고, 나는 폭풍과도 같은 슬픔의 의식을 치루고 나왔다. 그런데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겉으로는 아무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PT 를 받고 있다.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데 드는 시간이 3일 이었던 것이다. 허무라는 말로 형용되지 않는다. 그냥, 아빠가 없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이상할 뿐.
주말마다 나는 아빠 집에 간다. 상당히 많은 사진첩이 있다. 아빠 엄마는 우리가 아기였을 때부터의 사진을 다 가지고 있다. 이 사진들을 버릴 수는 없어서, 하나 하나 떼놓는 작업을 주말마다 했다. 아빠 엄마가 어렸을 때의 사진첩도 있었다. 두 분이 중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연애하던 시절의 사진첩도 있다. 너무 소중한 사진들이다. 모두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밴드에 올렸다. 또, 아빠가 젊었을 때 미국과 일본에 장기 출장 다니던 시절, 아빠와 엄마가 손으로 쓰던 편지 뭉텅이도 발견했다. 역사적 사료를 찾은 것처럼 신기했다. 그 당시 아빠는 업무 지시를 회사로부터 받을 때 편지로 받으셨다. 무게로 우표값을 산정하던 시절이라, 편지지가 한없이 얇았다. 볼펜자국이 뒤에 남아있을 정도다. 한자와 한글이 섞인 편지들은 마치 한시 같기도, 시조 같기도 했다. 문장들은 시적인 표현으로 가득했다. 그 당시는 참 낭만적이었다. 업무 편지도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어떻고, 외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은지, 한국 현지는 어떤지 구구절절이 이야기한 후, 업무 지시는 마지막 문단에 간단히 불릿 포인트로 이야기하고 배경 설명하는 식이다. 엄마 아빠의 편지는 각자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서로 그립다는 이야기, 서로를 걱정 말라는 이야기 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당시 우리가 아기였을 때의 근황도 이야기해 주셨다. 그때 엄마 아빠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지금의 나 보다 훨씬 젊은 시절인데도, 참 어른스러웠다.
지금은 아빠 엄마 집에서 유용한 것들을 하나 하나 우리 집으로 가지고 온다. 유품 중 챙길 것, 버릴 것을 하나하나 나누는 중이다. 동생들은 아빠 엄마 집이 가깝다 보니 오히려 방문을 자주 하지 않는다. 나는 매번 간다. 안 가면 이상하다. 끊어내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집이 팔린 지금 남은 시간 동안 아빠 엄마의 남은 DNA와 함께 더 있고 싶다. 혈당체크기 옆에 버리는 알코올솜 뭉텅이를 모은 박스에는 아직도 아빠의 피가 묻어있다. 엄마의 옷도, 아빠의 옷도 아직도 장에 걸려있다. 엄마 아빠 집에서는 그 만의 특이한 냄새가 있다. 아빠 엄마가 남겨둔 체취가 섞여 있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남겨놓은 내 DNA의 오리진 한 세트씩도 오롯이 남겨져 있다. 나는 그 공간에서 내 DNA 가 공명하는 걸 느낀다. 나는 그렇게 엄마 아빠가 남긴 흔적들로부터 힘을 얻으려고 하나보다. 엄마 아빠 집에 가면 좋다. 빈집이지만, 남은 허용된 기간 동안 나는 그 집에서 힐링하고, 힘을 얻어오고, 때로는 슬퍼할 것이며, 그런 식으로 나의 의식을 마무리할 것이다.
상속세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렇게 다른 쪽으로 내 울적한 이별 여정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감상에 젖는 건 어쩔 수 없다. 돌아가신 날은 잊을 수 없을 거다. 그만큼 아름답기도 했다. 아빠는 집에서 휠체어에 앉아 햇빛을 받으시며 조용히 돌아가셨다. 나는 화상통화로 아빠의 임종을 보았고, 마지막 순간 아빠는 눈물을 흘리셨다. 간병인이 외출하던 날, 두 동생은 아빠를 보러 왔고, 바로 그 시간이었다. 나는 대면으로 임종을 지키지 못했지만 동생들의 배려로 화상통화로 정면에서 아빠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빠 집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동생들이 감싸준 이불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편한 얼굴이었다. 아빠는 드라마 속에 멋있게 돌아가시는 배우들처럼 가셨다. 아빠는 엄마의 골분을 집에 가지고 오시길 바라셨었다. 그건 불법이야 아빠. 라고 말했었다. 불법인지 아닌지는 사실 모르긴 했지만, 안될 것 같았다. 엄마 곁에 계시고 싶었던 거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계시던 3주 간, 우리는 수목장을 계약했고,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셨을 때 수목장 이야기를 들으시고 왠지 마음에 평화를 얻으신 것 같았다. 아빠, 엄마랑 같이 거기 들어가시면 돼요. 우리도 거기 들어갈 거야. 8명까지 같이 들어갈 수 있대.
나도 죽으면 거기 들어가고 싶다. 우리 자매 세 부부가 다 들어가면 선착순 8명이 딱 채워진다. 사위들이야 옵션이다. 나는 거기 들어갈 거다. 죽으면 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휴식할 곳이 정해진 것이다. 인생은 짧으니까, 그리고 죽음은 긴 것이니까. 긴 시간을 예비해 둔 것 같아 마음이 편한 것인가 보다.
상속세가 개정이 되었다. 그러나 2025년 1월부터가 적용대상이다. 만약 우리에게도 적용되었다면, 우리는 2-3억에 해당하는 세금을 안내도 되고, 특히 아이 유학비로 허덕이고 있는 나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스란히 세금을 내야 한다. 마음이 별로 좋지 않다. 아마 2025년 1월까지는 연명 의료가 많아질 것이다. 연명의료비는 얼마일까? 나는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빠가 어차피 완치될 암이 아니었다면 암으로 아프시기 전에 쇠약해져서 돌아가신 게 다행인 일이었을 거라고 위안하고 있다.
6개월은 이렇게 지나간다. 우리는 10월 31일, 이 집을 완전히 떠나보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추석, 아빠와 엄마에게 그 집에서 드리는 마지막 식사로 차례상을 차려드리고 나올 생각이다. 아빠 엄마가 남긴, 그들의 DNA 가 살아있는 몇 가지 유품들을 각자 챙길 거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 삶의 현장 속으로 아빠 엄마를 데리고 오고, 그 집은 또 다른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내어줄 생각이다. 그렇게 삶이 리사이클링 되는 거구나. 그걸 경험하는 중이다. 감정적으로 풍부해진다. 또, 나의 삶도 유한하다는 것을 느끼며, 되도록이면 남은 사람들에게 짐을 주지 않도록, 유품을 적게 남기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은 축적되지 않는 배움이다. 누구나 부모님은 두분 뿐이고, 부모님을 잃는 경험도 인생에 딱 두 번뿐이니까 말이다.
이 글은 상속세 개정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감상적인 글로 마무리가 되어버렸다. 아직은 그렇게 까지 이성적인 시각으로 지금 이 이슈를 다룰 수가 없는가 보다.

